서울 잠실에서 근무하는 30대 직장인 김민정씨는 영양제 6개를 잊지 않고 복용한다. 출근 직후 복용하는 종합비타민과 유산균을 시작으로 점심 식사 후 챙겨 먹는 오메가3와 밀크씨슬, 간식처럼 먹는 면역 젤리, 퇴근 후 마그네슘까지가 그의 영양제 루틴이다.김씨가 영양제 구입에 지출하는 돈만 매달 10만원 안팎이다. 하지만 복용 후 신체 변화를 체감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김씨는 “솔직히 효과가 눈에 바로 보이지는 않는다”면서도 “안 먹으면 당장 내일 몸이 망가지거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피로가 몰려올 것 같아 끊을 수 없다”고 말했다.이 모습은 대한민국 성인 다수의 일상과 닮아 있다. 뚜렷한 신체적 효능을 체감하지 못하면서도, 혹시 모를 건강 이상에 대한 불안과 염려 때문에 영양제 복용을 습관처럼 이어가는 ‘선제적 위안’ 소비가 대세로 자리 잡은 모습이다.법적 명칭 섞인 영양제…효능 착각도국내 성인 다수가 습관처럼 챙겨 먹는 ‘영양제’는 법적 용어가 아니다. 건강 유지를 목적으로 복용하는 제품 전반을 편의상 묶어 부르는 대중적 개념이다. 실제 소비자가 영양제라는 이름으로 접하는 시장 내부에는 제각기 다른 법적 테두리와 검증 기준을 가진 제품들이 섞여 있다.영양제 범주는 성격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우선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과학적 근거를 제출해 기능성 원료임을 인정받은 ‘건강기능식품’(건기식)이 있다. 한국건강기능식품협회 집계 기준 국내 시장 규모는 약 6조원으로 추산된다.약국에서 주로 판매되는 고함량 비타민이나 간 기능 개선제 중 상당수는 약사법의 적용을 받는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된다. 의약품은 질병의 치료와 예방을 목적으로 엄격한 임상시험을 거쳐 효능과 안전성을 법적으로 검증받은 제품이다. 또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유행이 번진 다이어트 효소, 즙, 콜라겐 젤리처럼 별도의 기능성 인증 과정이 없는 ‘일반 가공식품’도 영양제로 인지되며 유통된다.문제는 대다수 소비자가 까다로운 법적 분류나 식약처의 기능성 검증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건강 관리’ 목적으로 제품을 찾는 데다, 제형마저 알약·캡슐·젤리 형태로 비슷하다 보니 구분이 모호해진 탓이다.결과적으로 엄격한 검증을 거친 의약품부터 일반 가공식품에 이르기까지, 제각기 다른 성격의 제품들이 영양제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뭉뚱그려 소비되는 실정이다.예를 들면, H&B 스토어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접하는 ‘면역 젤리’나 ‘비타민 구미’ 중 상당수는 식약처의 건기식 인증 마크가 없는 일반 가공식품(캔디류)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단맛을 낸 간식에 불과한 제품을 알약이나 영양제 수준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구매하고 있다.제약사 관계자는 “효과를 홍보할 수 있는 제품은 건기식 같이 식약처 인증을 받은 것들이지만, 사실 소비자들에게는 일반의약품이고 건기식, 일반식품을 막론하고 영양제라는 명칭으로 소비되고 있다”며 “실질적으로 효과를 기대한다면, 건기식인지 일반의약품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건강 상태 아닌 ‘불안’이 소비 동력경계 없이 소비되는 영양제 시장에서 소비를 끌어올리는 진짜 동력은 체감되는 의학적 효과가 아닌 ‘건강 불안’이다.소비자 데이터 플랫폼 오픈서베이가 발간한 ‘건강기능식품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스스로 인식하는 건강 상태는 영양제 구매나 섭취 경험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자신의 건강 상태를 '매우 나쁨'으로 인식하는 집단과 ‘매우 좋음’으로 인식하는 집단의 섭취율은 각각 69.3%와 73.2%로 큰 차이가 없었다.영양제 소비를 끌어올리는 핵심 변수는 ‘평소 건강에 대해 얼마나 걱정하고 불안해하는가’였다. 건강 걱정이 ‘매우 많은’ 집단의 경우, 건강이 안 좋아졌을 때 영양제를 탐색하고 구매하는 비율이 52.2%에 달해 걱정이 적은 집단(30.1%)을 크게 웃돌았다. 영양제를 섭취하는 비율 역시 건강 걱정이 많은 층에서 78.1%로 가파르게 상승했으며, 이들이 매일 섭취하는 영양제 개수도 평균 3.44개로 늘어났다.섭취 목적 역시 질병 치료(6.9%)보다 면역력 향상(52.9%), 피로회복(46.7%), 질병 예방(31.4%) 등 일상적인 건강 유지와 선제적 방어가 주를 이룬다. ‘섭취 시 심리적 안정을 느껴서 먹는다’고 답한 응답자가 9.8%에 달했으며, 여성 전 연령대에서 심리적 안정을 위한 복용 비중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추세를 보였다.또 다른 제약사 관계자는 “만약 비타민 D가 부족하다면 병원에서 비타민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며 “건기식을 꾸준히 섭취하는 건 습관이거나, 건강 유지에 대한 안정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양제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식단 보충제를 넘어, 바쁜 일상 속에서 최소한의 자기관리를 하고 있다는 ‘위안’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선제적 불안’에 의존한 영양제 소비가 실질적인 생리학적 이득으로 연결되는 비중은 크지 않다고 지적한다.박민선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특별한 질환이나 결핍이 없는 건강한 성인이라면 복수의 영양제를 상시 복용해야 할 필요성이 거의 없다”며 “성장기 어린이나 영양 흡수가 저하된 65세 이상 고령층, 질병으로 음식을 섭취하기 어려운 경우가 아니라면 영양제가 주는 실질적 득보다 스트레스 관리와 신체 활동 유지가 훨씬 우선시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